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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25

아버지를 처음으로 넘어뜨린 날

조회 수 1333 추천 수 0 2006.02.16 18:12:42


아버지를 처음으로 넘어뜨린 날



어렸을 때,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잦은 술주정으로 인한 어머니에 대한 손찌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수많은 욕설들이
나는 싫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머니를 미워하는 아버지라 생각했었다.

4년전 내가 고등학생일 무렵이다.

밖이 쌀쌀한 겨울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평소처럼 술을 잔뜩 마시고 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의 술취한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싸쥐고 내 방에 틀어박혀 앉아 있었다.
술을 마시는 그가 나는 죽일듯이 싫었었다. 항상 그렇듯 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여느때보다도 취기가 더한 상태셨다.
갑자기 오자마자 큰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있어 너무나도 듣기 거북한 욕설들이 어머니께 오가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아빠의 술주정에 질려버릴대로 질린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버렸다.
어머니는 착한 분이시다. 아주 예쁘고 착하신 분이다.
대답없이 그냥 욕을 들을 줄로만 아신다.
순간 '짝'하고 뺨을 치는 소리가 방문밖에서 크게 들리더니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내 방에서 뛰쳐나와 아버지를 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연이어 어머니를 때리려 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 나는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심장이 터지고 정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내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재빨리 아버지의 손을 낙아 채 '쿵'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아버지의 몸에 부딪힌 술병도 덩달아 떨어져 깨져버렸고
뚝뚝 바닥에 흘러나온 술은 아버지의 몸을 적시었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흙먼지가 씌워진 작업복을 입은 채 기운없이 쓰러진 나약한 사람을 보았다.

몇초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던 내 자신의 상황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때의 아버지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얼어붙도록 고요했던 그 시간, 생기가 어려있던 아버지의 눈빛을 말이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깨진병을 주워담고 계셨고
나와 쓰러진 아버지는 서로를 보며 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말없이 일어나셔서 나를 잠시 보시더니 이내 방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나에 대한 아버지의 눈빛은 분노나 증오의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바로 나에 대해 갖고 계신 미안함과 죄책감 그 이상이었다.
나는 그 점을 느꼈지만 그자리에서 어떠한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단 한마디도...
그때의 일은 나의 생각과 감정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다.

키가 크신 우리 아버지는 말 수가 적으시다.
평소 집에 같이 계셔도 잘 말씀을 안하시는 분이다.
밖에서의 일도 무슨일이 있었든간에 나와 함께 있을 땐 전혀 말씀을 안하신다.
몇일 전 아버지께서 친구분들과 산에 휴가를 갔다 오셨다.
좀처럼 놀러 나가는 경우가 없는 아버지께서 말이다. 드문 일이었다.
나가시기 전 나에게 카메라 조작법만 수차례 물어보시고 불쑥 나가셨는데
사진을 무수히도 많이 찍고 돌아오셨다.
두꺼운 사진들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피곤하신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드셨다.
웬 사진들을 이렇게 많이 찍었는지 나는 웃으면서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삼겹살과 소주를 워낙에 좋아하시는 분이라
엉뚱하게도 고기를 굽고 술먹는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무표정한 아버지의 사진속 얼굴들..
워낙에 감정들이 얼굴에 안잡히는 분인데..
우리 아버지.. 언제 이렇게 주름살이 늘었는지...

문득 어떠한 사진 한 장을 보자 나는 금새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바위 옆에서 아버지가 친구분들과 나란히 선 채 찍은 사진.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보기 드물게 분명히 웃고 계셨다.
정말로 아버지의 주름잡힌 미소가 담긴 사진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여태 아버지를 웃게 만든일이 몇번 없었는데..
아.... 정말 나는 못난 아들이었구나.

내 생각엔 아버지의 웃는 모습이 자주 보고 싶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사진을 조심스레 빼내어 지갑속 한 구석에 껴 두었고
이제 그 사진은 어떠한 것과 견줄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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