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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의 편지

조회 수 1021 추천 수 0 2006.02.27 04:56:09


" 현재 폭풍은 동해안으로 향하고 있으니 피서객은 각별한 주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태풍은 A급 태풍으로.... "



라디오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잠이 깬 듯 졸리운 눈으로 나를 한번 보고 싱긋 웃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정말 큰 마음 먹고 온 여행인데... 하필 폭풍이라니. 젠장.



창 밖으로는 한 길도 넘게 넘실대는 바다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비스듬하게 유리를 때리는 빗방울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와 파란 바람에 대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 이제 다 왔어? "



" 아니. 조금만 더 가면 돼. "



" 그럼 나 조금 더 잘께.... "



그래, 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파묻는 그녀를 보며



난 빙긋이 웃음지었다.



그래. 어쨌든 여행은 혼자 하는게 아니니까 괜히 내가 기분 나빠해서



그녀까지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그녀와 나 둘 만을 덩그러니 남겨놓고



횡횡히 갈길을 가 버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을 받쳐들기 힘이 들었다.



자꾸 뒤로 뒤집히는 우산은 '나는 폭풍과 맞서기엔 너무 연약해요.



그냥 포기하고 비 맞으세요' 라고 빈정거리듯 귓속말을 건내고 있었다.



하지만, 폼으로라도 우산을 버릴 수 없어 고집스럽게 우산대를 잡고



20여분을 걸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 계세요? "



" 아, 예약한 분들이시구만. 고생했수. 얼른 들어와요. "



" 네. "



" 폭풍 때문에 다들 예약을 취소해서, 아마 한동안 나가지도 못 할텐데.

괜찮겠수? "



" 그래도 여행 취소할 수가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



" 이구... 바람이 하두 불어서 비를 다 맞았구만.

내 옥수수라도 좀 삶아올테니, 들어가요. "



그녀와 나는 민박집 아주머니가 참 친절해서 좋다는 무언의 눈빛을



건낸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리를 뻗고 4명정도가 잘 수 있는 크기.



하지만, 오히려 크면 큰대로 을씨년스러울테니 둘이 지내기엔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아주머니가 가져오신 옥수수를 먹고, 안받으시겠다는 손에 억지로



얼마의 돈을 쥐어드린 후, 우리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요번 태풍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기상 캐스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상 캐스터는 자기가 이렇게 오랜 시간 화면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 정도는 폭풍에 감사하는 듯이 보였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방 안에서 3일이 지났다.



텔레비젼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가끔 화장실에 가고, 그게 전부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둘이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남들이 말하는 "아무 일" 이라면, 우리는 이미 1년 전에 거쳤다.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기차가 끊겼고,



그래서 여관에서 자다가 어찌어찌해서..



그런 틀에 박힌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같이 자는 게 어색하지 않은 사이. 아주 오래된 연인들. 그게 우리 사이였다.



" 그런데 그냥 이렇게 방에만 있다가 가?"



그녀가 내 팔을 베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그럼 어떡해. 바람 때문에 넌 날아갈지도..

아니다. 안날아가 겠다. 요새 살쪘잖아. 배도 좀 나오구. "



꼬집..



" 야야, 아퍼.. "



그녀는 모른 척 하고 이야기를 계속 했다.



" 뉴스 보니까 내일 폭풍의 눈이 동해안을 지나간대. 그럼 바람 이 좀

잔잔해질꺼 아냐. 우리 그때 바다 보러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

때문에 바다도 못 만져보고 가면 너무 슬프잖아. 응? "



" 그래, 그럼. "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래, 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난 우리는 지금까지 창문을 울리던



귀신소리같던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았다.



비도 쏟아붇듯 내리던 것이 이젠 보슬비 정도로 바뀌었다.



신기했다. 이게 태풍의 눈인가.



" 우리, 나가자. "



" 응. "



그녀와 나는 3일만에 처음으로 민박집을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민박집 아줌마는 파도가 거세질 것 같으면 얼른 돌아오라는 염려어린



당부를 했지만, 그 말은 고이 접어서 머리 한구석에 쳐박아 두었다.



" 와.. 그렇게 파도가 세더니 지금은 잠잠하네? "



" 그래도 우리 가기 전에 한번 보고 가라고 하늘이 인심쓰나 보다. "



" 그러게. 훗... "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 넓은 해안에 우리 둘 뿐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지만, 이전처럼 암울한 회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 파도가 살며시 치는 바다로 들어갔다가,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는, 다시 내게로 와서 방긋이 웃었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려주고는, 나도 웃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걷다보니 파도가 조금 거세진 것 같았다.



나는 아까 머리속에 쳐박아두었던 아주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 우리 돌아가자. 파도가 아까보다 거세진 것 같아. "



" 응..잠깐만. 아, 저기 있다. "



그녀는 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갑자기 주저 앉더니 품에서 무얼 꺼내는 듯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조금씩 겹쳐지던 파도는 무서운 기세로 해안을 향해 달려왔고,



그녀의 머리 위로 1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해일이 그녀를 뒤덮으려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웃은 그 순간, 그 파도는 그녀의 몸을 덮쳤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해안경비대가 그녀의 시신을 찾으려고 바다를 수색했지만,



그녀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폭풍 때문에 그녀가 사라진 지 며칠 뒤에



수색을 시작했기 때문에 발견될 꺼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행방불명으로 처리해야 겠다는 수색대원의 말을 듣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잠을 자면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고, 그럼 그 뒤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식은 땀을 흘리며 주전자를 들어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지만,



여전히 마지막 그 기억은 생생하게 내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 후 1년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부모님들은 그래도 내가 괜찮은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속이 썩어버린 달팽이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오열하시며 내 가슴을 치던 그 날,



내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하지만 시간은 얼마나 냉정한가.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서



나는 사랑을 고백하던 볼이 붉은 여자 후배와 결혼을 했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낳았고, 이마에 주름살이 생겨났고,



머리숱이 적어져 갔다.



하지만 그녀를 잊지는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식은 땀을 흘리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는 차마 예전에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고, 그 여자가 그렇게



죽었다고, 아니, 행방불명되었지만 죽었을꺼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날은...

무척이나 추운 봄 날이었다.



회사에서 급히 강릉 대리점에 결산 보고서를 확인하고 오라는 출장 명령을



받던 날, 나는 무척이나 가슴이 떨렸다.



폭풍이 불던 그 날 이후로 단 한번도 동해안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다행이 결혼한 그 여자가 등산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피서는 전부 산이나



계곡으로 갔었다.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하기 싫었다. 언젠가 한번은 가 보아야 할 장소 아닌가.



20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 장소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생각은.



서류를 검토하고 별 문제 없음을 회사에 보고한 뒤에,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민박집이 있던 마을에 내렸다.



20년 전엔 둘이서 같이 내렸던 곳에 이번엔 혼자서 덩그러니 내렸다.



내게 머리를 기대고 졸리운 눈으로 웃던 그녀의 표정이 잠깐 머리를 스쳐갔다.



20년 전의 민박집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위치는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길이 전부 바뀌고 집도 전부



바뀌어서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한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찾는 걸 포기하고 바닷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다는 20년 전 그대로였다.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바다는 파도 하나 하나까지 똑같았다.



폭풍의 눈 속에 잔잔하던 그 파도가 그대로 여기 다시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예전에 했던 그대로 바닷가를 따라 쭉 걸었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냥..

슬펐다.



그리고 계속 걷다보니, 그 장소에 오게 되었다.



바로 그 장소.

그녀가 파도에 휩쓸려간 그 장소.



문득 나는 궁금해 졌다.



그녀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반갑게 앞으로 달려나가 모래사장에



앉았던 이유를 한번도 궁금해 해 본적이없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손을 턱에 괴고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내 발 옆에 무언가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병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호기심으로 나는 그 병을 모래 속에서 꺼내 보았다.



그 병 속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럴리는 없었다.



설마 이 편지가 그녀가 남긴 편지일리는 없었다.



바다로 휩쓸려간 이 병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이 장소로 왔고,



그 병을 내가 보게 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 생각을 하며 앉은 바로 이 자리에 그 병이 놓여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힌 병을 깨뜨리고 노랗게 퇴색된 편지를 펴 보는 순간...



나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이 누가 되실지는 모르지만,

제 비밀 하나를 알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 임신했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바다 속에서 내가 이 편지를 보아 주기를



20년 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차가운 바다 속에서



이 편지를 보아 주기를... 20년 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 이제 됐어... 미안해. 늦게 와서. 그리고... 사랑해.. "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기다렸어. 오랫동안...."



그녀도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봄바람은 차갑게 나를 감싸고 바다를 향해 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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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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