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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25

밤길

조회 수 1594 추천 수 0 2006.03.18 01:31:08


<……눈, 눈을 먹어 봤나요?>


대답대신 나는 웃는다. 여자도 웃는다. 아, 여자는 놀랍게도 아름답다. 슬프게 아름다워서 그의 머리에 꽂혀 있는 상장(喪章)이 그대로 어울린다.


<……밤에 내리는 눈을 보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의 창문이 떠올라요. 그때는 날마다 밤이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밤만 되면 빨리 날이 밝기를 눈뜨고 앉아서 기다렸죠.아침이 되면 눈이 쌓였다고 밖은 한참 소란스러운데 난 그렇지 않았어요. 그 시절, 겨울에 눈은 나 몰래 내린 적이 없었거든요. 날이 빨리 밝기를 기다리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걸 지켜 봤고 어쩐지 그런 밤만 무섭지 않았어요>


여자가 비죽이 웃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얼굴을 문지르다 말고 차창가에 갖다 댄다. 손바닥만큼 습기가 닦이고 그 사이로 내가 보이고, 더듬거리는 여자가 보이고, 잠든 아기가 보이고, 내리는 눈이 보인다.


<그를 잃고 ……어렸을 때 밤을 무서워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아요. 그는 나에게 아주 잘했어요. 나는 결혼 전에 한 사람과 헤어졌고…… 그가 그이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죠. ……사실 나는…… 그래요 나는 다른 사람을 나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가 있어서 불행하거나 외롭지는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그를 잃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나만 사랑하면서…… 무서워요. 하느님이 마치 나에게 무엇을 께우쳐 주기 위해 그를 데려간 것만 같아서>


훗날에…… 먼 훗날에…… 더 먼 훗날에라도 잊지 못하고 기어이 내가 기억해 내고 말 것 같은 미소를 여자가 짓는다.


<……자꾸만 …… 왜 얘기가 하고 싶을까?…… 들어주겠어요?>


<……그럼요>


<…… 나는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거울을 볼 때나 햇빛을 느낄 때 나는 내가 두려웠죠. 거울 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 한없이 서글퍼지고 뜨거운 무엇이 내 안에 차오르곤 했죠. 햇빛 아래를 걸을 때도 그랬어요. ……그를 잃기 전에는 그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어요. ……슬픔 같기도 했고 공포 같기도 했죠. ……몰랐던 게 아니라 피했겠죠. ……피하고 싶었겠죠. ……그에 대한 연민이 미 칠만큼 들끓어요. 살아 있는 그를 잘 보지 못하고 이젠 없는 그를 미치게 사랑해요. 나는 말예요. 이제야 저녁때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그는 이젠 올 수 없는데 말예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예요. 그만이 내 사람이었어요.……아세요? 내마음……이제야 나는 그와 진짜 사랑하며,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그의 조끼를 들고……살았을 때 그가 원한 것처럼 그에게 내 무릎도 내주고……기다리고 사랑하는 데 나를 다바치겠어요……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있었을까요? 아닐 거예요, 나는 나만 사랑하며 그저 그런 날들이 흘러간다고 짜증을 내고 있을 뿐일 테죠?>

말하는 동안 입술을. 초조해졌지만 여자는 가끔 미소짓고 목소리의 평정도 잃지 않는다.


<그의 죽음과 내 마음을 맞바꾼 것만 같아요>


여자는 한숨도 쉬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자의 높낮이가 없는 낮은 목소리는 절망이 어느 만큼 몰아왔는지를 감지하게 한다.


<……전날 밤에 꿈을 꿨었어요. 납작한 집들이 있고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알지도 못하는 얼굴들이 흰옷을 입고 떼지어 내게 다가왔어요…… 그 집들, 그 햇빛들, 그 흰 옷들... 아침에 그에게 출근하지 말라고 했죠. 꿈 이야긴 안 했어요. 그는 과학 선생님이었으니까……내가 자꾸 하루 쉬라고 그러니까 그가 내놓은 제안이 그럼 자전거를 안타고 버스 타고 가겠대요…… 자전거로 통근을 했었거든요……차라리 그날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갔었더라면……그의 제자가 그러대요. 수업 도중에 그가 느닷없이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소리를 내는지 아느냐? 묻더래요. 아무도 대답을 안 하니까 아악- 그러는거다, 라면서 웃더랍니다…… 그 혼자 크게 웃었대요…… 제자들은 선생님이 갑자기 왜 그러시나? 엉뚱하게 그를 봤겠지요……사고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났어요……그래서인가봐요……저물녘이면은요……그가 꼭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인 것만 같거든요……그 생각에 친정집에 더 있을 수가 없어요……빨리 가야 한다 빨리……그가 와 있을지도 모르는데……나를 찾고 있는 모습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그의 모습이……터무니 없지요? 그는 안 오지요??>


여자는 미소짓고 있다. 터무니없지요? 그는 안 오지요?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눈 먹어 봤어요?>


이제는 내가, 우리 사이의 침묵에 난처해진 내가 묻는다. 여자는 눈을 옮겨 나를 빤히 본다.


<…… 저 눈을 한 줌 먹으면 다른 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와 나의 아이예요. 난 이 애에게 젖을 만들어 줘야 해요……>


여자는 또 눈을 옮겨 잠든 아기를 오래 본다. 어느 순간 한없이, 여자가 한없이 정답게 느껴진다.
절망하는 자들이 갖는 뒤틀림이 여자에겐 없다. 여자의 손을 잡고 싶어진 나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나왔을 때 내가 불렀기라도 한 듯 여자가 조용히 나를 향해 고개를 든다. 여자의 눈과 나의 눈이……마주친다.


  


  


조회수 : 7256


글쓴이 :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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