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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01 공수사단의 개요 및 창설
101공수사단은 1942년 루이지아나의 Claiborne캠프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전신인
101보병사단은 원래 1918년 7월 23일에 창설되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었다. 급조된 보병
사단이라, 무기나 장비 병력등이 충분하게 가동되지 못했었다.
전시를 위한 임시편성의 부대였기 때문에 1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사단은 해체되었다.
1921년 지역방위개념의 대두로 '101 보병사단'이 재창설되었고 사단사령부는 밀워키에 위치했습니다.
예비 군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실제병력이 없는 'Paper Army'였습니다. (서류상으로만 부대원이
등록되어 있고 전시에 예비군을 소집하는 형식의 지금의 주방위군이나 예비군사단의 개념)
공수사단의 창설
공수사단이란?
당시에는 비행기의 항공능력도 떨어지고, 항공기당 병력수송도 10~2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후방
침투후 교란작전을 기초로 하는 '특수전'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2차대전당시 공수사단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와는 개념이 다른 '정규전 부대'였습니다.
(전 특전사 출신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미 101공수와 특전사를 비교하는 건 자존심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특전사가 장비면에서 열악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들보다는 전투능력이 뛰어날 것입니다.
그린베레라면 또 모르겠네요..그린베레는 미 육군에서도 일정기간 이상 복무한 자에게만 응시기회를
주고, 일정기간 테스트를 거친 병력들만 요원으로 선발합니다. 즉 101공수사단 소속 장병들도
그린베레에 지원하려면 별도의 테스트를 거쳐야만 하고 지원률대비 합격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합니다. 미국내 전사연구가들도 이들을 Special Force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즉 부대이동을 비행기를 이용하여 낙하산으로 이동하는 것이외에는 전형적인 공격,방어등의 정규
보병사단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 여담시리즈1-
『밴드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부대작전들도 2편에 포진지 급습
외에는 일반 정규전이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임.』
(한국의 특전사와 미군부대중 하나를 비교하라면 월남전때 창설된 그린베레가 비교적 근접한
개념의 부대입니다. )
이들 공수사단이 특수부대와 다른 차이점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하면
1) 정규전을 수행 (전선과 무관한 비선형 전투, 게릴라전이 아닌, 전선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방어,
공격의 전선형 전투 수행)
2) 소수병력이 아닌 사단병력 (포병, 지원부대를 포함)이 전선에 투입됨.
101공수부대의 창설
미군의 공수사단은 1940년 미육군내에서 최초로 낙하산병들에 대해 일련의 시험을 거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포트베닝에서의 성공적인 테스트에 고무된 미육군은 대규모 부대의
공수작전이 가능한 병력의 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에는 파슈름야거와 같은 공수사단이, 영국에는 레드데블스
(Red Devils, 붉은 악마 라는 명칭이 이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와 같은 영국공수사단들이 전장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여담시리즈2-
세계 최초의 특수부대인 영국의 SAS와 코만도가 창설된 것도 2차대전 때입니다.
미국은 이에 자극을 받아 레인져 연대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다른나라의 공수부대를 기초로 미 육군성은
2차대전 발발과 동시에 2개의 공수사단을 창설했습니다.
81보병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임무를 변경하여 제82공수사단 으로 재편성하였고
역시 101보병사단도 101공수사단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후에 11,13, 17,18, 21의 5개 공수사단이 창설되었으나,
대부분 2차대전말에 투입되어 일반 보병사단
으로 후방을 지키다가 2차대전이후 해체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창설시 주력이 된 부대는 502 공수보병 연대였습니다. 327, 401 글라이더 보병연대가
후에 합류되었습니다.(라이언일병구하기에보면 중간에
글라이더부대 어쩌구나오는데 그게401글라이더부대라고합니다..) .
377,321,907포병연대가 사단의 포대로 합류되었습니다 .
참고로BOB의 506연대는 1943년에합류되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막사는 1942년부터 짓기 시작함....)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유럽본토의 상륙을 위해
미본토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4년에 영국으로
훈련장소를 옮기었습니다.
D-day
유타비치에 상륙예정인 제 4 보병사단 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포병부대를 와해시키위해서
후방에 공수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편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944년 6월 5일, 오후10:15분 6,600명의 제 101공수사단 병력들은 1,432대의 C-47수송기를 탑승하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머지않아 유타비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적의 맹렬한 대공포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적의 포화때문에 대부분의 비행기가 원래 목표지점을 찾기가
어려워 원 목표지점에서 벗어난 지점
에서 대부분의 병력들이 낙하를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여, 조종사들
은 더욱더 목표지점을 찾는게 어려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발대가 1시간전에 미리 낙하를 했지만 제시간
에 맞추어서 낙하지점을 지상에 표시하는 임무에 실패를 했습니다.
이날 지상에 착륙한 공수부대원들중에
약 1,500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략 60%의 장비들이
늪에 빠지거나 적의 수중에 들어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악조건하에서도 지상에 무사히 착륙
한 병력들은 각자의 지휘관을 찾아서 부대를 재정비하였습니다.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의 낙하지점이
뒤엉켜서 제대로 부대를 정비하기 어려워, 짬뽕사단(?)으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적의 포진지를 급습하거나,
참호를 파서 노르망디를 상륙한후 전방에서 전진
해오고 있는 제 4 보병사단과의 조우를 기다렸습니다.
Carentan
유타비치에서 고전분투끝에 상륙에 성공한 제 4 보병 사단과
그날 오후에 조우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날밤 유타비치와 인근지역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병력들은 참호를 파고 다음날 있을 또다른
전투를 위해 그날 밤을 참호에서 보냈습니다.
다음날 101공수사단은 또 다른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오마하비치와 유타비치 사이에 위치한 Caraten(카라텐)
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상륙병력중에 오마하비치에 상륙하던 병력들이
가장 치열한 저항을 받은데다가 병력의 피해가 막심하였고,
인근에는 독일군의 정예보병사단인SS사단와기타등등..의사단이 진주해있었습니다.
오마하비치로 적의 증원병력이 증파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Caraten 을 공격하는 것이 101공수사단의 새로운 임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의 최정예 팬져기갑사단과 독일공수사단등이
지원군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Caraten 을 점령하여 이들의 지원경로를 차단하는
게 시급했습니다. 1944년 6월 8일 이른아침에
Caraten 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영화에는 안나오지만 당시 오마하비치에 상륙했던
병력중의 하나인 제 29 보병 사단 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했었는데, 101공수사단의 카라텐 점령으로
오마하비치에 상륙한 병력들이 조금씩
전진할수 있었고, 101 공수사단의 활약으로 제 29 보병사단도
포위망을 풀고 역습에 가담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Caraten 은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만약 101공수사단의 카라텡 공격이 무산되었다면,
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증원된 독일군 기갑,보병사단들에 의해 연합군의 진격에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Caraten 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은 팬져기갑사단과
최정예 독일공수사단을 동원해서 역습을 시도하고,
보병으로만 구성되어 대전차 전력이 약했던
101공수사단이 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때마침 제3 보병 사단과 82 공수사단의 기갑전력을
지원해주던 제2기갑사단의 신속한 기동지원으로
위기를 막을수 있었습니다.
(미군이 샤먼탱크를 이끌고 독일전차를 격퇴시키는모습
6월14일에야 비로서 유타와 오마하비치 모두 미군이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었습니다.
101공수사단병력중 502연대는 82공수사단과 제4 보병사단과 전선을 형성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재빠르게 인접부대와전선을 형성하고,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올라가는 방식의
전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현대전같이 헬기
나 차량이 보편화되어 신속한 기동성을 제공할수 없기 때문에,
인접부대와의 전선구축은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보병사단으로 전선을 구축하고 기갑부대로 지원을 하는 방식의 전선형 전투에 익숙한
세계최강의 미육군이 월남전에서 맥을 못쓴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였기 때문입니다. )
327 글라이더 보병연대는 오마하비치에 있던 제29 보병사단,
제 1보병사단과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제1공수사단은 약 3주간의 걸친 소규모 전투끝에
북부프랑스 인접지역까지 진군하였습니다.
operation Market -Garden
.
승승장구한 연합군의 사기는 드높아져서, 그해 크리스마스 이전에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할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적에 대한 정찰등을 게을리 한것도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한 요인중의 하나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영국 공수사단Red Devils 과 함께 네덜란드의
안트워프항을 점령하기 위해 적진에 투하되고,
전진해오는 아군의 지상병력을 조우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Market -Garden작전을 설명하려면 너무많은 페이지를 사용하므로 Market -Garden
는 다음에 더자세히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Bulge Battle
1944년 12월 16일, 패퇴하기만 하던 독일군이 아르덴에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고,
이로인해 연합군전선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101공수사단은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바스통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101공수사단은 머지않아 독일군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의해 포위를 당했고,
항복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항복을 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을 했습니다.
마침내 패튼 장군 휘하의 제 4 기갑 사단이 101공수사단을 구하기 위해 진격해왔고
이를 이어 제3 보병사단이 증원병력으로 증파되어 왔고,
이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역습을 가했습니다.
바스통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임무로 미육군에서 유일하게
101공수사단에게 최강의 육군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Distinguished Unit Citation' 이라는 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보병사단들과 함께 전선을 구축하여,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대규모 작전은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항복을 하였고,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독일로 진격을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샴페인
2차대전중 최종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945년 5월1일~8일까지
Berchtesgaden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을 기습하는 임무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제 3 보병사단과 함께 Berchtesgaden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여기서 독일군 SS사단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현재의 101 공정사단
* 101공수사단은 한국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 월남전등의 전쟁에서 미군의 신속
기동 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는 101 공수사단 (101st AirBorne Division)에서 101공정사단
(101st Heliborne division)으로 명칭과 임무가 변경되었고
공수투하가 아닌 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기동부대로변경되었습니다.
506연대 1대대는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주한미군으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101공수사단은 1942년 루이지아나의 Claiborne캠프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전신인
101보병사단은 원래 1918년 7월 23일에 창설되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었다. 급조된 보병
사단이라, 무기나 장비 병력등이 충분하게 가동되지 못했었다.
전시를 위한 임시편성의 부대였기 때문에 1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사단은 해체되었다.
1921년 지역방위개념의 대두로 '101 보병사단'이 재창설되었고 사단사령부는 밀워키에 위치했습니다.
예비 군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실제병력이 없는 'Paper Army'였습니다. (서류상으로만 부대원이
등록되어 있고 전시에 예비군을 소집하는 형식의 지금의 주방위군이나 예비군사단의 개념)
공수사단의 창설
공수사단이란?
당시에는 비행기의 항공능력도 떨어지고, 항공기당 병력수송도 10~2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후방
침투후 교란작전을 기초로 하는 '특수전'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2차대전당시 공수사단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와는 개념이 다른 '정규전 부대'였습니다.
(전 특전사 출신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미 101공수와 특전사를 비교하는 건 자존심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특전사가 장비면에서 열악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들보다는 전투능력이 뛰어날 것입니다.
그린베레라면 또 모르겠네요..그린베레는 미 육군에서도 일정기간 이상 복무한 자에게만 응시기회를
주고, 일정기간 테스트를 거친 병력들만 요원으로 선발합니다. 즉 101공수사단 소속 장병들도
그린베레에 지원하려면 별도의 테스트를 거쳐야만 하고 지원률대비 합격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합니다. 미국내 전사연구가들도 이들을 Special Force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즉 부대이동을 비행기를 이용하여 낙하산으로 이동하는 것이외에는 전형적인 공격,방어등의 정규
보병사단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 여담시리즈1-
『밴드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부대작전들도 2편에 포진지 급습
외에는 일반 정규전이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임.』
(한국의 특전사와 미군부대중 하나를 비교하라면 월남전때 창설된 그린베레가 비교적 근접한
개념의 부대입니다. )
이들 공수사단이 특수부대와 다른 차이점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하면
1) 정규전을 수행 (전선과 무관한 비선형 전투, 게릴라전이 아닌, 전선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방어,
공격의 전선형 전투 수행)
2) 소수병력이 아닌 사단병력 (포병, 지원부대를 포함)이 전선에 투입됨.
101공수부대의 창설
미군의 공수사단은 1940년 미육군내에서 최초로 낙하산병들에 대해 일련의 시험을 거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포트베닝에서의 성공적인 테스트에 고무된 미육군은 대규모 부대의
공수작전이 가능한 병력의 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에는 파슈름야거와 같은 공수사단이, 영국에는 레드데블스
(Red Devils, 붉은 악마 라는 명칭이 이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와 같은 영국공수사단들이 전장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여담시리즈2-
세계 최초의 특수부대인 영국의 SAS와 코만도가 창설된 것도 2차대전 때입니다.
미국은 이에 자극을 받아 레인져 연대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다른나라의 공수부대를 기초로 미 육군성은
2차대전 발발과 동시에 2개의 공수사단을 창설했습니다.
81보병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임무를 변경하여 제82공수사단 으로 재편성하였고
역시 101보병사단도 101공수사단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후에 11,13, 17,18, 21의 5개 공수사단이 창설되었으나,
대부분 2차대전말에 투입되어 일반 보병사단
으로 후방을 지키다가 2차대전이후 해체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창설시 주력이 된 부대는 502 공수보병 연대였습니다. 327, 401 글라이더 보병연대가
후에 합류되었습니다.(라이언일병구하기에보면 중간에
글라이더부대 어쩌구나오는데 그게401글라이더부대라고합니다..) .
377,321,907포병연대가 사단의 포대로 합류되었습니다 .
참고로BOB의 506연대는 1943년에합류되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막사는 1942년부터 짓기 시작함....)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유럽본토의 상륙을 위해
미본토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4년에 영국으로
훈련장소를 옮기었습니다.
D-day
유타비치에 상륙예정인 제 4 보병사단 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포병부대를 와해시키위해서
후방에 공수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편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944년 6월 5일, 오후10:15분 6,600명의 제 101공수사단 병력들은 1,432대의 C-47수송기를 탑승하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머지않아 유타비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적의 맹렬한 대공포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적의 포화때문에 대부분의 비행기가 원래 목표지점을 찾기가
어려워 원 목표지점에서 벗어난 지점
에서 대부분의 병력들이 낙하를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여, 조종사들
은 더욱더 목표지점을 찾는게 어려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발대가 1시간전에 미리 낙하를 했지만 제시간
에 맞추어서 낙하지점을 지상에 표시하는 임무에 실패를 했습니다.
이날 지상에 착륙한 공수부대원들중에
약 1,500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략 60%의 장비들이
늪에 빠지거나 적의 수중에 들어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악조건하에서도 지상에 무사히 착륙
한 병력들은 각자의 지휘관을 찾아서 부대를 재정비하였습니다.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의 낙하지점이
뒤엉켜서 제대로 부대를 정비하기 어려워, 짬뽕사단(?)으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적의 포진지를 급습하거나,
참호를 파서 노르망디를 상륙한후 전방에서 전진
해오고 있는 제 4 보병사단과의 조우를 기다렸습니다.
Carentan
유타비치에서 고전분투끝에 상륙에 성공한 제 4 보병 사단과
그날 오후에 조우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날밤 유타비치와 인근지역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병력들은 참호를 파고 다음날 있을 또다른
전투를 위해 그날 밤을 참호에서 보냈습니다.
다음날 101공수사단은 또 다른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오마하비치와 유타비치 사이에 위치한 Caraten(카라텐)
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상륙병력중에 오마하비치에 상륙하던 병력들이
가장 치열한 저항을 받은데다가 병력의 피해가 막심하였고,
인근에는 독일군의 정예보병사단인SS사단와기타등등..의사단이 진주해있었습니다.
오마하비치로 적의 증원병력이 증파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Caraten 을 공격하는 것이 101공수사단의 새로운 임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의 최정예 팬져기갑사단과 독일공수사단등이
지원군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Caraten 을 점령하여 이들의 지원경로를 차단하는
게 시급했습니다. 1944년 6월 8일 이른아침에
Caraten 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영화에는 안나오지만 당시 오마하비치에 상륙했던
병력중의 하나인 제 29 보병 사단 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했었는데, 101공수사단의 카라텐 점령으로
오마하비치에 상륙한 병력들이 조금씩
전진할수 있었고, 101 공수사단의 활약으로 제 29 보병사단도
포위망을 풀고 역습에 가담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Caraten 은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만약 101공수사단의 카라텡 공격이 무산되었다면,
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증원된 독일군 기갑,보병사단들에 의해 연합군의 진격에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Caraten 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은 팬져기갑사단과
최정예 독일공수사단을 동원해서 역습을 시도하고,
보병으로만 구성되어 대전차 전력이 약했던
101공수사단이 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때마침 제3 보병 사단과 82 공수사단의 기갑전력을
지원해주던 제2기갑사단의 신속한 기동지원으로
위기를 막을수 있었습니다.
(미군이 샤먼탱크를 이끌고 독일전차를 격퇴시키는모습
6월14일에야 비로서 유타와 오마하비치 모두 미군이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었습니다.
101공수사단병력중 502연대는 82공수사단과 제4 보병사단과 전선을 형성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재빠르게 인접부대와전선을 형성하고,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올라가는 방식의
전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현대전같이 헬기
나 차량이 보편화되어 신속한 기동성을 제공할수 없기 때문에,
인접부대와의 전선구축은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보병사단으로 전선을 구축하고 기갑부대로 지원을 하는 방식의 전선형 전투에 익숙한
세계최강의 미육군이 월남전에서 맥을 못쓴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였기 때문입니다. )
327 글라이더 보병연대는 오마하비치에 있던 제29 보병사단,
제 1보병사단과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제1공수사단은 약 3주간의 걸친 소규모 전투끝에
북부프랑스 인접지역까지 진군하였습니다.
operation Market -Garden
.
승승장구한 연합군의 사기는 드높아져서, 그해 크리스마스 이전에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할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적에 대한 정찰등을 게을리 한것도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한 요인중의 하나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영국 공수사단Red Devils 과 함께 네덜란드의
안트워프항을 점령하기 위해 적진에 투하되고,
전진해오는 아군의 지상병력을 조우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Market -Garden작전을 설명하려면 너무많은 페이지를 사용하므로 Market -Garden
는 다음에 더자세히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Bulge Battle
1944년 12월 16일, 패퇴하기만 하던 독일군이 아르덴에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고,
이로인해 연합군전선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101공수사단은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바스통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101공수사단은 머지않아 독일군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의해 포위를 당했고,
항복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항복을 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을 했습니다.
마침내 패튼 장군 휘하의 제 4 기갑 사단이 101공수사단을 구하기 위해 진격해왔고
이를 이어 제3 보병사단이 증원병력으로 증파되어 왔고,
이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역습을 가했습니다.
바스통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임무로 미육군에서 유일하게
101공수사단에게 최강의 육군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Distinguished Unit Citation' 이라는 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보병사단들과 함께 전선을 구축하여,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대규모 작전은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항복을 하였고,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독일로 진격을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샴페인
2차대전중 최종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945년 5월1일~8일까지
Berchtesgaden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을 기습하는 임무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제 3 보병사단과 함께 Berchtesgaden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여기서 독일군 SS사단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현재의 101 공정사단
* 101공수사단은 한국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 월남전등의 전쟁에서 미군의 신속
기동 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는 101 공수사단 (101st AirBorne Division)에서 101공정사단
(101st Heliborne division)으로 명칭과 임무가 변경되었고
공수투하가 아닌 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기동부대로변경되었습니다.
506연대 1대대는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주한미군으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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