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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준의 상성에 두 손 두 발 다든 지영과 그 일행은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공원 근처 식당촌으로 향했다. 식당촌으로 향하는 길에도 영준인 개방정을 멈추지 않았지만 웃기만 하는 선화도 성을 내는 지영이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예부터 소중한 사람에게 힘을 주기위한 영준이만의 표현법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원 입구를 빠져나갈 무렵 갑자기 영준이가 외마디 고음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12월의 흰 눈 속에서 태어난 듯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놀란 선화와 지영이 아이에게 달려가 걱정스레 물었다.
“꼬마야, 괜찮니?”
지영의 물음에도 아이는 묵묵히 일어나서 옷을 털더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했다. 단박에 무시당한 지영인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저기…….”
보다 못한 선화가 낮은 억양으로 부르자 그제야 백발의 아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니?”
선화가 천천히 다가가며 얼굴을 확인하려는 그 때 뒤돌아 본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신오한 기분에 휩싸이고 곧 사방이 고요해지며 상량한 산들바람이 선화의 온몸을 휘감았다. 온 세상에 백발의 아이와 선화 단 둘 밖에 없는 듯 청현하며 기분 좋은 안온감이 가슴을 파고들 즈음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가까웠군요…….”)
선화를 둘러 싼 영정은 어깨를 두드리는 영준의 손길에 의해 풀렸다.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보는 선화를 보고 영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해. 멍하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영준인 넋 빠진 표정의 선화를 뒤로하고 백발의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선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꼬마야, 괜찮으냐고 말 좀 해봐.”
“시끄럽습니다.”
영준일 뒤돌리며 지나친 아이는 선화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영이와 마찬가지로 단박에 무시당한 영준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하하, 아이라 봐주려고 했더니…….”
흥분하여 방방 뛰는 영준일 친구들이 붙들고 달래는 사이 이번엔 지영이가 아이의 앞을 가로 막아서며 말했다.
“얘, 버릇없게 형,누나들을 그렇게 무시하면…”
“비켜주시죠. 방해 됩니다…….”
(빠직)
“헉!”
오랫동안 지영이를 곁에서 지켜 본 친구들은 지영의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엄청난 후폭풍이 불기 전에 영준일 붙들고 있던 몇 명의 친구들이 지영에게로 옮겨갔다.
“이 꼬맹이가… 그래, 내가 오늘 예(禮)라는 걸 가르쳐 주마…….”
“지, 지영아! 너까지 왜 그러냐~”
친구들이 두 사람을 붙들고 고군분투 하는 동안 백발의 아이는 선화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올려보았다. 선화는 멍한 정신을 사리고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춘 후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저기, 부모님은 어디 있어?”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 저어보였다. 선화는 재차 물었다.
“혹시 부모님을 잃어버렸니?”
이번에도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그럼 누나가 찾아줄게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은 선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손길을 도외시하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겸연쩍어진 선화는 얼른 손을 거둬들이고 친구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먼저 가 있어. 난 저 아이 부모님 좀 찾아주고 갈게.”
“알았어. 빨리 데려가!”
친구들이 더 이상 힘이 부치는지 서두르라는 손짓과 함께 선화를 재촉했다.
“꼬맹이! 이리 안 와!”
“좀 참으라니까!”
그 사이 어느 샌가 부쩍 멀어져있는 아이를 따라잡기 위해 급히 달음질하며 생각했다.
“(언제 저렇게 멀리까지 갔지?)”
겨우 아이를 추급한 선화는 가쁜 숨을 허덕이며 말했다.
“가, 같이 가야지. 그러다 또 길 잃으면 어쩌려고…….”
“생각보다 체력이 약한 편이군요.”
“아, 응… 조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선화를 응시했다.
“(혼자가 아니군. 그래서 헷갈렸던 거야…….)”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선화는 아이의 시선에 당황하며 황급히 얼굴을 훑었다.
“아닙니다…….”
“참, 혹시 엄마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나니? 근처에서 찾고 계실수도 있잖아.”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 그, 그래…….”
무뚝뚝한 대답에 서먹해진 분위기 속을 거닐던 선화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어버리고도 놀랍도록 침착한 행동에 의구심이 들면서 한편으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아이의 백발이 눈에 들어왔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대화를 유도했다.
“그런데 넌 어디서 왔니?”
선화의 질문에 백발의 아이는 왠지 흠칫거렸다.
“갑자기 그건 왜…….”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얀 백발을 가진 아이는 처음 보거든. 다른 나라에서 왔나 해서…….”
그 말에 아이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질문하기 전에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한 번 더 고려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아, 미안. 말하기 곤란한 거구나…….”
분위기 반전은커녕 더욱 더 악화 시킨 것 같아 자책하던 선화에게 아이는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
어쩐지 어린나이에도 비밀을 지키려는 아이의 행동에 선화는 은근 귀여움을 느끼고 웃음이 나왔다.
“후훗, 그럼 언제 말해줄 건데?”
“당신에게 진정한 자유와 희망이 생길 때… 라고 말해두죠.”
“뭐……?”
순간 선화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에 멍하니 서있던 그 때 선화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저기…….”
향기로운 꽃내음을 머금고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돌아 본 그곳에는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금발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제 아이를 데리고 있어 주신건가요?”
여성의 외모에 넋 놓고 있던 선화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돌아보며 답했다.
“제 아이라고 하시면? 혹시 이 아이의 어머니신가요?”
“예.”
보통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면 혈안이 되어 걱정과 근심에 초췌한 몰골이 일반적이겠지만 금발의 여성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그러시구나, 실은 이 아이가 부모님을 잃어버리고 길을 헤매고 있더라고요. 같이 부모님을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찾아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보답은요. 괜찮습니다.”
“아니요. 언제 한번 저희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온화한 표정에 심신까지 편해지던 선화는 결국 못이기는 척 수락하였다.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여인은 백발의 아이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선화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누나.”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아이의 미소와 누나라는 호칭에 어리벙벙하면서도 내심 지금까지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행동했었는지 이해가 가는 선화였다.
“(약해 보이기 싫었던 거구나…….)”
아이를 바라보며 선화도 흐뭇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 … …”)
“(아…….)”
그렇게 백발의 아이와 헤어진 뒤 언제 왔는지 지영이가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
“…….”
“선화야!”
“어! 어, 언제 왔어?”
“네가 하도 안 오기에 와봤지… 그나저나 너 오늘 좀 이상해.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아, 아니야! 그런 거…….”
지영인 당황하는 선화의 태도에 한쪽 눈 꼬리를 올리며 의심하면서도 특별히 몸이 안 좋은 기색은 보이지 않자 이내 표정을 풀고 물었다.
“그 꼬맹이는?”
“부모님을 찾아서 돌아갔어…….”
“아휴! 그 얄미운 녀석! 꿀밤 한대 콩 쥐어박았으면 했는데…….”
지영이 분한 마음에 허공에 주먹질 하는 사이 선화는 아이와 여인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둘을 되새겼다.
“(도대체 그 아이는…….)”
한 편 선화와 헤어진 아이와 여인은 근처 건물 옥상에서 선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니 어떠셨습니까?”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을 쓸어 넘기며 여인이 물었다.
“예상 대롭니다. 괜찮은 분이네요.”
백발의 아이는 난간에 앉아 잠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예,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때가 머지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남겨둔 채 1월의 바람과 함께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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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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